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제리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이자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여겨 관심을 가졌다. 1830년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의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부채로 뺨을 맞고 쫓겨난 일을 계기로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하였다. 결국 알제리 북부 해역의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이었던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프랑스령 알제리|식민지로 삼았다]].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로마 제국]] 이후 아프리카에서 몇몇 도시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 [[파일:attachment/alg.jpg|width=100%]] || [[파일:attachment/643_3.jpg|width=100%]] || 알제리에서는 독립할 때까지 수많은 항쟁과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알제리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아예 프랑스 본토의 일부라고 간주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우며 유럽 프랑스 본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서 알제리를 영구히 지배할 목적으로 132년 동안 기반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적어도 대도시는 완전한 유럽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고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군의 주요 기지와 많은 군수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다. 다만 이러한 시설들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본국과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을 위주로 한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작 알제리인들은 프랑스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알제리인들의 90% 가량이 [[문맹]]이었으며 절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시민권조차 받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렸다. 그나마 20세기 초반에 알제리인들이 [[이슬람교]]를 버리면 프랑스 시민권을 주는 제한적인 조건이 붙었으나 이러한 조건에 응하여 이슬람교를 버리는 알제리인들은 매우 적었다. 이렇게 비참한 현실은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저절로 갖게 해 주었다. 물론 프랑스 본국도 이런 알제리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독립과 저항 의지를 없애려면 그들을 프랑스인들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했으나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인들의 비참한 사정을 알면서도 우격다짐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비참한 상태로 놓아두었다. 이러한 프랑스 본국의 오만함은 알제리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만들어낸 텃밭이었다.[* 출처: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현지에 정착해서 사는 알제리 거주 백인을 [[피에 누아르]](Pied-Noir)라고 불렀다. 피에 누아르의 후손들은 프랑스계뿐만 아니라 스페인계, 이탈리아계 역시 모두 피에 누아르로 불렸다. 피에 누아르와 그 후손 역시 알제리에서 엄청난 숫자를 자랑했다.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 전에 [[샤를 드골]]은 "모로코와 알제리는 절대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유럽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형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의 차원이 매우 다르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본토가 점령되면서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자 프랑스 당국의 권위는 떨어졌고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치솟았다.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 당국은 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타협을 거절했다. 1945년 5월 8일 [[승리의 날]],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이는 사전에 계획적으로 준비된 시위였는데 이미 3월부터 알제리인들은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해 독립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이미 시위대가 식민당국과 충돌하여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사망자 5명이 발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계획에 따라 시위가 벌어진 곳들 중 스티프 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다. 5천 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프랑스 국가 헌병대]]가 막아섰다. 이때 경찰과 [[헌병]]들이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 쐈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총격전으로 대규모 충돌이 벌어져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했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으며 시신이 훼손된 사례와 유럽인 여성이 강간당한 사례도 1건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사건을 그동안 진행된 반항을 무력으로 제압할 명분을 주는 기회로 여겼다.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프랑스 경찰 병력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세네갈인 식민지 부대, [[프랑스 외인부대]]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을 지급받고 동원되었다. 덤으로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했다. 여기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시킨답시고 케라타(Kherrata)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트루앵급 경순양함|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공군]]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량[[학살]]을 벌였다. 당시 인구 4천 명이 넘었던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3명은 중년 여성 1명, 20대 남성 1명, 어린이 1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어린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 친구들을 죄다 잃은 이 천인공노할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해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알베르 카뮈 연구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는 알제리로 가서 이 소설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2007년 당시 6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꿈에서 그 날이 자주 떠오른다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살고 있던 마을이 박살나 친구들도 모조리 죽었다며 동병상련으로 살아남은 다른 두 생존자랑 이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이제 60년이 지나다 보니 그 둘도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만 생존자로 살아 있다며 씁쓸하게 증언했다. 5월 16일까지 계속된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이후 이 수치는 2만 명으로 늘었고 알제리인들은 못해도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한다.[* 최소 6,000명에서 최대 45,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고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무장친위대|나치]] [[독일 국방군|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다음 세대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도 속속 여기 가담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중 북아프리카인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122,920명이다.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었던 FLN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된다.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였던 벤 벨라(1916~2012)도 이렇게 해서 반프랑스 항쟁에 뛰어든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부사관]] 출신으로 자유 프랑스에서 최고 등급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벤 벨라에 이어 알제리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도 프랑스 육군 부사관이었다. 여하튼 학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작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피에 누아르|유럽계 백인]]과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한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게리맨더링|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힘으로 일어서자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제리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했다. 봉기가 시작된 1954년 11월 1일까지는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